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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고 있는 청도는 중국 도교의 발상지다.
일찍이 5000~6000년 전의 신석기 시대에 이곳은 동이족(東夷人)이 거주하던 주요 지역 중의 하나였으며, 풍부하고도 다채로운 대문구(大汶口)문화와 용산(龙山)문화 및 악석(岳石)문화가 남아있다.

상ㆍ주나라 시대에 이곳은 중국 소금의 발상지로서 중국 “4대 고대 염장구역”과 “5대 고대항구”로 선정됐다.
춘추전국 시대, 산동지역에서 제2의 도시인 즉묵(即墨)이 이곳에 건설됐으며, “즉묵고성(即墨故城)”(지금의 평도(平度)시 경내)은 지금까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고대 도시유적지다. 월왕 구천은 랑야(琅琊, 지금의 교남(胶南)시 경내)대에서 천하 제후를 회맹하고 한 세대의 패주가 됐다.

진시황은 중국을 통일한 후, 다섯 번 천하를 순회하고 랑야에 세 차례 올랐다. 역사자료에 따르면 중국 최초의 원양항해는 서복(徐福)이 랑야에서 출발해 조선과 일본에 갔다고 기재돼 있다.
역사자료에 따르면 소년시기에 불기(不其, 지금의 성양구 경내)에서 교동왕을 역임한 한무제(汉武帝)가 청도지역을 가장 많이 순회한 황제라고 기재돼 있다.

당ㆍ송(唐宋) 시대에 이곳은 남북 해상운수의 “중계무역지”었고 중국 북방연해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교통중추지와 무역항구로 부상했다. 송나라 때에 판교진(板桥镇, 지금의 교주시 경내)에 “시박사(市舶司)”를 별도로 설치해 대외무역을 관리했다.
원나라 때에 해상으로 식량을 운송하는데 편리토록 하기 위해 중국에서 유일한 해운하 —— 산동반도를 가로지르는 교래운하(胶莱运河)를 팠다.

명∙청나라 때에 이곳은 중국 북방지역에서 중요한 해안방어 요새가 되어 교오(胶澳)라고 불렀다.

1891년 6월 14일, 청나라 정부는 교오(胶澳)에 방어시설을 구축하면서 청도를 건설하였다.
1897년 11월 14일, 독일이 “거야교안(巨野教案)”을 빌미로 청도를 차지함에 따라 청도는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 일본이 독일에 이어 청도를 접수하였다.
1919년에 청도 주권회복을 목적으로 일으킨 “5.4 운동”은 중국 근•현 대사의 분수령이 됐다
1922년 12월 10일에 청도를 회수한 중국 북양정부는 청도를 통상항구로 개설하였다.
1929년 7월에 국민당정부는 청도특별시를 설립하였고 1930년에는 청도시로 명명하였다.
1938년 1월에 일본이 다시 청도를 점령하였다.
1945년 9월에 국민당정부는 청도를 인수한 후 그대로 특별시라고 불렀다.
1949년 6월 2일, 화북지역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해방된 청도는 산동성 직할시로 편입되었다.
1981년에 중국의 15개 경제중심 도시 중의 하나로 선정되었다.
1984년에는 중국의 14개 연해개방도시 중의 하나로 선정되었다.
1986년에는 5개 계획단열시 중 하나로 선정되어 성 1급 경제관리권한을 받게 되었다.

1994년에는 전국 15개 부(副)성급 도시 중의 하나로 편입되었고 유명한 국가급 역사 문화 도시로 부상하였다.